'어머? 저기 선...'

옆에 있던 여자는 말하는 여자의 말을 잘라버린다.

다른 쪽 길로 가자고 손짓하며 여자를 이끌고 가버린다.

 

'왜요? 저기 선희 아니에요?'

'맞아~ 자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구나?'

'뭐를요?'

'저 집하고 엮여서 좋을 거 없어 애든 어른이든'

여자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손사래를 친다.

'그래도 저기 밖에서 자고 있잖아요 지금 눈도 오는데'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뭐가 어찌 됐든 엮이지 마. 좋은 꼴 못 본다고'

여자는 걸음을 재촉하며 말을 이어갔다.

'어휴~ 저놈의 집 이틀의 한 번꼴로 집안 살림 다 내팽개치면서 부부싸움하고

아들 하나 있는 놈은 허구한 날돈 달라고 지 애비 멱살잡이에 여편네는 오죽 사나워? 동네에서 저 집 여자랑 안 싸운 사람이 없어. 막내가 아주 늦둥이로 태어났는데 애도 별나. 귀신본다는 애기도 있고 신기있어서 미래를 보는데 죽은 사람들을 콕콕 집어내면서 집안이 어쩌고저쩌고 한다니까. 다른 애들 다 유치원 통학버스 타는데 쟤만 걸어 다녀~ 어른 발걸음으로도 족히 30분은 되는 거리를 애 혼자 한 시간씩 왕복을 한다니까~ 보통 애였어 봐 그게 가능한가? 애들이 선희 쟤~ 눈빛이 무섭다고 같이 놀지도 않아~'

'아니 그래도...'

'그냥 신경 끄라니까 그러네~ 마가 잔뜩 낀 집이야~ 엮여서 좋을 거 없어~ 내말 들어~'

 

하얀 함박눈이 조용히 내리는 날 짙은 남색 대문 아래에 5~6살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책가방을 베고 웅크린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다행히 좁은 골목길 안쪽 집이라 바람은 덜 불었지만, 춥지 않았을 리가 없다.

멀어져 가는 아줌마들의 대화를 바람결에 듣고 있던 여자아이는 더 웅크린 채 집으로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나 귀신 못 보는데.. '

아이는 차라리 귀신이라도 본다면 심심하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숨 잔 듯 시간이 흘렀을 무렵 누군가 여자아이를 깨운다.

'선희야~ 일어나~ 여기서 왜 자~'

'오빠?'

'아. 이걸 또 누가 옆으로 옮겨놨데~ 그러지 말라니까. 일단 들어가자'

'응'

선희라고 불리는 여자아이는 방긋 웃으며 커다란 눈으로 눈웃음을 친다

 

선희네는 동네에서 두 번째로 큰 집이었다.

큰 집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선희네 아버지는 상이군인이었는데 군대에 있을 때 전신주에서 떨어졌다느니, 전쟁통에 무릎에 총을 맞았다느니 하는 소문이 있었다 선희네 아버지는 절름발이였는데 왼쪽 무릎이 움푹 패어있었다. 그래도 손재주가 뛰어나서 큰집을 두르고 있는 마당에 작은방을 두 개나 만들어 세를 내주고, 집 내부도 리모델링 해서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법대 남학생들에게 하숙을 해주고 있었다. 하숙생 중 한 명이 하숙집으로 돌아왔을 때 선희는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선희가 키가 작아서 높이 있는 대문을 열수 있게 만든 끈을 잡지 못하자 문 앞에 돌절구를 놔뒀었다

선희가 유치원이 끝나서 집에 오면 돌절구를 밟고 올라가 대문을 여는 끈을 잡아당기면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커다란 돌절구를 자꾸만 옆으로 치워두는 바람에 간혹 선희는 집 대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잠들곤 했다.

 

따뜻한 집으로 들어간 선희는 책가방을 정리하고 유치원에서 내준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씩 더 갈수록 하숙생들이 한 명 두 명 집으로 들어왔고 선희네 가족들도 집으로 돌아왔다.

 

두려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반주로 시작하는 소주 병을 한 병, 두병 늘려갔고, 그런 아버지를 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갔다.

하숙집은 조용했다. 아무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듯 조용했다.

이런 시간이 선희는 제일 무서웠다. 일부러 TV라도 틀어두면 무서움이 덜했다.

 

선희는 재혼가정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에 아들이 어머니 쪽에 딸이 있었고 두 분이 재혼을 해 어머니 나이 48세에 나은 늦둥이 막내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선희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마치 자식은 이미 데리고 있던 딸 하나라는 듯 선희에게는 무관심했고, 차별도 심했다.

 

선희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 오빠였다. 언니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었다.

오빠는 고등학생이었는데 툭하면 술을 먹고 취해서 집으로 들어와서 온 집안을 다 부숴버리기 일쑤였고 아버지를 때리기도 했다 안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언니와 잠을 자던 선희의 온몸 위로 미닫이문의 유리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지면 여기저기서 핏방울이 생기고 정신없는 욕설과 폭행의 현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오빠라는 사람은 선희에게 있어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소주 병이 세 병째가 되니 슬슬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선희는 언니를 데리고 언니와 함께 쓰는 방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언니는 음악을 크게 틀어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끄러운 소리가 잠시 잠잠하더니 방문이 벌컥 열린다.

어머니는 선희의 손을 잡아채 끌고 나갔다

 

'너 말해봐. 이거 아빠 잘못이야? 엄마 잘못이야?'

'.......'

'말 못 해? 벙어리야? 바보야? 병신이야? 왜 말을 못 해? 누가 잘못한 거냐고!'

'몰라'

'몰라? 이거 영 바보네~ 지 애비 닮아서 머리가 아주 돌덩이야~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어?'

 

겨우 5~6살 된 선희에게는 제일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버지 잘못도 아닌 것 같았고, 어머니 잘못도 아닌 것 같았다.

선희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바보 같아서 병신 같아서 말을 제대로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몇 시간 동안 언성이 높아지며 부부 싸움을 하는데도 하숙생들은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선희의 언니도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선희는 폭언이 오가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 중간에 앉아서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식은땀이 났다. 무릎 꿇고 앉은 다리가 저려오고 눈물이 났다.

 

'니가 뭘 했다고 울어? 어? 조용히 안 해?'

 

그저 눈물 한 방울이 흘렀을 뿐인데 어머니는 선희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선희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까 봐 숨죽이며 무릎 꿇고 있었다.

 

저녁 8시부터 시작된 다툼은 밤 12시를 넘겼고 끝내 집으로 경찰들이 찾아왔다.

동네 주민이 시끄럽다고 신고를 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이 왔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경찰들은 경고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선희는 경찰이 와서야 꿇고 있던 무릎을 펼 수 있었다. 선희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다리에서 쥐가 나면서 힘이 풀렸다.

숨죽이며 있던 선희는 그제야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다.

방에만 있던 하숙생들도 언니도 그제야 밖으로 나와 선희를 챙겼다.

 

그렇게 시끄럽던 집은 경찰들이 오고도 한 시간은 더 시끄럽다가 조용해졌다.

잠든 선희는 꿈틀거렸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끙끙대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선희의 악몽을 깨워주지는 않았다.

 

2024.12.10 pm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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